ANDTAX의 추억 / / 2022. 9. 5. 00:47

훈민정음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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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한글로 워드프로세서 자격증을 취득하였는데, 자격증을 취득할 당시 나이가 중1, 2학년이었습니다. 컴퓨터 학원은 전부 한글을 사용하였고, 워드로 자격증을 취득하는 학생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공공기관에서는 워드프로세서로 대부분 한글을 사용합니다. 단순히 문서작업뿐만이 아니라 공문서 기안 프로그램도 전부 한글에 맞춰져 있습니다. 한글을 사용하지 않으면 업무 자체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물론, 정부 라이선스로 오피스로 설치되어있고, 또한 한컴오피스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관업무나 정부과제 등 공공기관과의 협업을 노리는 사기업들은 한글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종종 사기업에서 들어온 문서를 보면 워드로 작업된 글을 한글로 옮긴 것이 티가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집에는 PC가 있었고, 당시에는 학교에서도 컴퓨터 교육이 흔하지 않던 때라, 다른 사람이 어떤 프로그램을 쓰는지 뿐만 아니라 어떻게 컴퓨터를 쓰는지도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잠깐 486 컴퓨터를 설치해주셨다가, 어느새 윈도우95가 설치된 컴퓨터를 사용했는데, 바탕화면엔 빨간색 네모난 워드프로세서가 설치되어있었습니다.   

 

    훈민정음이라고 쓰인 그 프로그램을 쓰면서 딱히 불편함을 느껴본 적은 없었습니다. 느리지만 잉크젯 프린터도 있었고, 출력을 해서 가져가면 그 문서가 어떤 워드프로세서로 작성되었는지 구분하는 사람 또한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학급문집을 만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애초에 컴퓨터가 있는 학생이 거의 없다 보니, 워드 작업을 하는 봉사를 할 수 있는 사람 자체가 너무 적었습니다. 컴퓨터가 있는 사람은 당연히 문집 작업을 하는 사람으로 선정되었는데, 열심히 방학을 다 태워 워드 작업을 해서 선생님에게 1.44인치 디스켓을 전달드렸더니, 하나도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를 알아보니 학교 컴퓨터는 당연히 한글이 설치되어있었고, 제가 작업한 훈민정음 작업 파일은 열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해결이 되었다."는 말을 담임선생님께 들었습니다. 저는 워드 작업을 분명히 했으므로, 저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한 오류가 있었겠거니 하는 맘이었습니다. 그 후로 담임선생님이 저에게 할당된 워드 작업 파일을 다시 타이핑을 하였는지, 어디서 훈민정음 설치 파일을 구했던지 해서 해결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주류 프로그램을 사용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설계 관련된 일을 하시던 아버지는 남들이 오토캐드, 지금의 오토데스크를 사용할 당시에도 ME10이라는 생소한 프로그램을 사용하였고, 남들이 인터넷으로 메가패스를 설치할 당시 두루넷을 설치했습니다. 이런저런 마이너 한 선택을 하면서, 저는 남들과 다른 컴퓨터 환경에 노출되었다는 생각은 합니다.

 

    훈민정음이라는 프로그램은 제가 컴퓨터학원을 다니면서 잊히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글로 워드프로세서 자격증을 취득하였는데, 자격증을 취득할 당시 나이가 중1, 2학년이었습니다. 컴퓨터 학원은 전부 한글을 사용하였고, 훈민정음은 커녕 워드로 자격증을 취득하는 학생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공공기관에서 일을 하게 된 지 8년째, 우연히 훈민정음이라는 프로그램이 정음글로벌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서비스되다가, 결국 단종되었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음글로벌이라는 프로그램은 삼성전자와 농협, 우체국에서만 사용했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한글을 사용하지 않으면 공공기관과 일을 할 수 없다는 문제점은 예전 훈민정음을 사용하지 않으면 삼성과 일을 할 수 없다는 것과 동일한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삼성전자에서 젊은 시절을 근무하시다 사업을 시작하고, 현재는 마땅히 진척이 없는 상황에 있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의도했건 아니건 저를 삼성에서 사용하던 프로그램을 사용하게 해 준 경험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제가 만약 삼성에서 근무하게 되었다면 그때의 추억을 가지고 정음글로벌이 단종되기 전에 아쉬운 감정이 들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삼성은 정음글로벌 말고도 심비안이나, 삼성자동차 등의 크고 작은 도전이 실패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성 하면 굴지의 대기업으로 인식하나, 큰 기업을 운영하면서도 변화와 포기를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몰리기도 하고, 특히 정권과도 크고 작은 문제로 시달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컴퓨터에 훈민정음을 설치할 당시에만 해도, 아버지가 삼성을 그만두게 될지, 훈민정음이 단종될 것이라든지, 거액을 투자하며 산 삼성자동차가 상장폐지된다는지 하는 것들을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삼성이 어떤 회사인지 잘은 몰랐지만, 우리 가족은 나름 아버지가 삼성에 다니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은 지금 추억으로만 남아있습니다.

 

    문집의 원고를 타이핑하면서 컴퓨터로 옮기면서, 저는 학교에 몇 없는 컴퓨터 보유자이고, 타자도 빠르고, 무엇보다 선생님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취해서 밤을 새워가며 작업을 하였지만, 파일이 어떠한 것도 열리지 않아 난처해하는 선생님의 표정을 보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와서는 너무나 쉬운 문제였으나, 학교에서 나만 빼고 모두가 다른 프로그램을 쓰고 있다는 것을 몰랐고, 그러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너무나도 나중이었습니다.

 

    정음글로벌을 개발하던 삼성전자 직원도, 자동차를 만들던 삼성자동차 직원도 모두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열정을 쏟고 피땀 흘려 살아온 모든 순간이 어느 순간 사라지거나, 가치가 없거나,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는 다른 가치가 더 소중하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상실감을 저는 다 알지는 못합니다.

 

    그저,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 한글을 쓰고 있는지 몰랐다. 나는 최선을 다했고, 그걸 다른 사람들이 몰라주는 것뿐이다,라고 위안하기에는 너무나 속상한 추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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